[경기도검도회] 이순신장군 동상 다시 바로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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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기도검도회 작성일10-11-30 조회2,001회본문
이순신 장군 동상 다시 바로 세우자!
민족의 성웅(聖雄) 장군 이순신은 위대한 승장(勝將)이다.
그 승장(勝將)의 칼을 쥔 자세는 항장(降將)의 자세다.
장군이 항복할 때 칼을 오른손에 쥔다. 그 이유는 전투의지가 있을 때는 즉시 칼을 뺄 수 있는 입장이 왼손에 칼을 차든 쥐고 있어야 한다. 왼손잡이건 오른손잡이건 칼은 왼쪽에 있다.
각종 언론에서도 그리고 검도를 하는 본인도 여러 차례 견해를 밝힌바 있다.
적어도 민족 성웅(聖雄) 이순신장군 동상에 대한 시시비비라면 정부당국에서도 쉬쉬하고 지날 것이 아니라 가부를 결정지어 두 번 다시 이런 반론제기를 못할만한 학론 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정권 때 마다 제기되는 문제 이다. 동상 청소 한답시고 작업을 한다면 차제에 아주 칼의 길이와 그 칼 차는 왼쪽 오른쪽 위치와 그 칼의 조선식, 일본식도 선별하여야 할 것이다. 그 청소 하는데 드는 경비가 얼마인지 모르되 적절한 학자나 전문가에게 연구비를 지원하여 타당한 논리를 배경으로 이순신장군의 위용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곳에 많은 국고를 투자하면서 이런 중대한 사업에 돈을 아낄 것이랴! 물론 작품성의 우수함은 익히 알고 있으나 제작자에게 충분한 자료나 지식을 전달할 여건이 안 된 상태에서 만든 것이란 이해는 간다.
검도 전문인으로써 생각해보자
우리 일반부 선수가 사용하는 죽도가 길어야 118센티 이고 진검은 죽도보다 훨씬 짧은데도 이순신장군 동상의 칼은 땅바닥에 짚고 있으면서 어깨를 넘는 길이다. 그 칼은 현충사에 소장 되어 있는 칼을 보고 제작 한 것으로 생각되나 그런 실수가 있는가?
전장 197.5센치 무게 5킬로로 1594년 이순신의 부하 태귀련 이무생이 만들어 바친 헌상 품이지 실전용 칼아 될 수가 없다. 적어도 그 칼을 쓸려면 180센치 신장의 검객이 1미터 10내지15센치 길이의 칼을 쓰는 우리의 입장으로써는 이순신장군의 칼은 2미터 40센치 이상의 신장이라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 헌상한 칼의 무게도 5킬로 글램 인데 현대 검도 죽도의 성인용 무게가 500 그램이 규정 무게이다. 그리고 진검의 무게도 약 700그램에서 1키로 그램 전후 정도 인데 어떻게 5킬로 글램의 칼을 찰 수 있으며 사용 할 수 있단 말인가? 억지로라도 명분을 만든 다면 상징적 칼을 동상이니까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너무나 무리한 과장이다. 또 한 가지 일본은 유일하게 칼 날이 위로 가게 차는 도(刀)문화이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도 칼날을 위로 가게 차는 것이 옳다. 이순신 장군의 시조 긴 칼 옆에 차고의 긴 칼을 규명 해야 한다. 그리고 칼은 싸울 의지가 없는 항장(降將)이 싸울 의지 없음을 표하는 자세로서 오른손에 칼을 잡는 것이다. 일본처럼 칼의 문화가 발달한 나라도 황제나 신전 앞에서는 칼을 칼집 채로 오른손에 잡되 손잡이 머리(柄頭)가 뒤쪽을 향하게 잡음으로써 칼을 뽑지 못할 자세를 취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순신장군의 칼은 일본식 칼인가? 조선식 칼인가? 혹은 중국식 칼인가? 하는 점이다.
뒤 늦게 왼손으로 칼을 잡는 동상이 다시 나타나는데 이것 역시 앞서 말했듯이 칼 길이. 무게. 왜색. 한국식. 선별 선택의 중론을 통한 결과 물 이라야 할 것이다. 더욱이 일본도법의 물타(物打) 타격법과 전통 우리 검술의 타돌 법이 틀리는데 그 부분은 어떻게 처리 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 연구는 최소한 한.중(韓中)이 함께 연구해야할 성격이고 일찍이 경기도 검도 회 연구 분과 위원회에서는 그 연구물로 2006년 대한 체육회 연구 상 까지 수상한 바 있어 더욱 관심을 쏟는 것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모모야마(桃山1592-1596) 시대로 이순신 장군의 대도(大刀) 이전에는 일본의 칼처럼 날과 등 사이가 볼록하게 칼 몸이 휘어진 활모양의 만도(彎刀) 는 한국에서는 발견 되지 않았다. 이때만 해도 우수한 일본 검술 도검 문화가 앞서 있어 도공들이 모방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경우 이미 헤이안(平安:794-1192)시대 이와 같은 모양의 칼이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 도공이 훨씬 이전 기술을 알려 주었고 우리 칼이 건너가 일본 검의 원류를 이루었다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다.
이씨조선 개국 이후 우리검술은 그 수련 기록이 전무한 상태였다. 있었다면 말 타기와 궁시(弓矢)가 있었을 뿐이다. 임진왜란 직후 일찍 귀순한 왜장 사야가(沙也可)가 일본 도술(刀術)과 왜도(倭刀)를 보여 주었거나 그 훨씬 이후숙종 때 일본서 검술을 배워온 김체건의 일본 도술(刀術)의 옅은 수준으로 왜도(倭刀)를 보여 주었을 정도이다.
그 무렵 조선 해안과 명나라해안을 귀찮게 하던 왜구(倭寇)들을 통해서도 유입될 수도 있었던 근거로 칼만은 왜식(倭式)으로 제작 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명나라 왜구 척결의 명장 척계광도 어렵게 생각 했던 왜구들의 높은 검술 수준에 당혹 했을 정도 인 만큼 왜도를 모방 할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런 연유로 이 순식 장군이 설혹 왜식(倭式) 도(刀) 를 찾다 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으나 민족 자존심상 한국 도(刀)를 차야 된다면 이 문제는 별도로 신중하게 논의 하여 결정 하면 될 것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모모야마(桃山1592-1596) 시대로 이순신 장군의 대도(大刀) 이전에는 일본의 칼처럼 날과 등 사이가 볼록하게 칼 몸이 휘어진 활모양의 만도(彎刀) 는 한국에서는 발견 되지 않았다. 이때만 해도 우수한 일본 검술 도검 문화가 앞서 있어 도공들이 모방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경우 이미 헤이안(平安:794-1192)시대 이와 같은 모양의 칼이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 도공들이 훨씬 이전 일본에게 기술을 알려 주었고 우리 칼이 건너가 일본 검의 원류를 이루었다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다.
검술 문화가 발달한 일본인 들이 와서 광화문 네거리에서 기준을 넘어선 긴 칼을 오른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항복할 준비가 된 항장이 성문 활짝 열어놓고 기다리는 형상이라고 비웃는다면 무슨 타당한 논리로 항. 변명 할 것인가?
항장(降將)의 모습이 아닌 승장(勝將)의 모습으로 사실에 최대한 근접한 사료를 근거로 자랑스러운 우리민족 성웅 동상 바로 세우자.
그리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칼의 길이에 대한 표현도 정리해야 한다. 대도(大刀) 소도(小刀) 장도(長刀) 단도(短刀)등이 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대도(大刀)는 관운장의 청룡도(靑龍刀) 같은 자루가 아주 길고 도신(刀身)이 짧은 칼을 뜻하고 소도(小刀) 는 그 보다 짧은 즉 도신(刀身)이 길고 손잡이가 짧은 칼을 의미 한다. 또 한 가지 단도(單刀)라는 표현은 쌍도(雙刀)에 대한 표현이다.
그리고 장도(長刀) 단도는 길고 짧다는 의미 이지만 단도의 경우는 한손으로 쥐는 아주 짧은 칼을 의미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길고 짧다는 의미로만 쓰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대도(大刀) 소도(小刀) 장도(長刀) 단도(短刀)의 길이가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검도 본의 실행 경우의 대도(大刀) 대 소도(小刀) 라고 하는 것도 청룡도 정도의 길이의 칼을 대도(大刀)라 한다면 현대 검도의 대도(大刀)는 중도(中刀)라고 함이 이치에 합당하다.
2010년 11월 15일
경기도검도회장 김 재 일
※태구련(太九連)- 태귀련(太貴連)이라고도 쓰며 이조 중기의 도공(刀工)
선조 때 칼 잘 치기로 이름이 높아 언복(彦福)과 함께 이순신 및 조방장(助防將) 박종남(朴宗男). 신호(申浩) 그리고 충청수사(忠淸水使) 선거이(宣居怡)의 환도(還刀)ff 만들었다. 이순신장군의 장검(長劒-실은 장도(長刀)가 옳음)을 만들었다. 이순신 장군이 장검은 충남 아산군 현충사에 있다.
※“박씨 부인 전“같은 가상 소설이나 ”임진록“에 이순신 장군이 적군의 배에 뛰어 올라 신비한 검술을 겨누다. 라는 구절은 삼국지등 중국군담(軍談) 소설의 영향 탓으로 봐야할 것이다. 이씨조선 이후 우리검술은 그 수련 기록이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있었다면 임란 이후 사야가가 일본 검술을 보여 주었거나 숙종때 일본서 검술을 배워온 김체건의 일본 검술 의 얕은 수준 정도이다.
※칼날 위로차기의 내력
서양의 한 네델란드인 쓴 일본 풍속 비고 (日本 風俗 備考) “나 일찍이 일본의 도검을 보았는바 그 예리한 것은 세계에서 비할 만한 것이 없다 그 칼날(刀刃)의 제조는 심히 정미(精微)하여 면도날과 같다. 그 강리(剛利)함은 제물(諸物)을 저항하는데 견디며 칼날(刀刃)을 사용하여 철정(鐵釘)을 깎는다. 하고 기술되어 있다. 쇠로써 쇠를 깎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전란이 잦은 그 시대에 무기로써의 칼은 더욱 제조의 발달을 보게 된다. 토바 죠코(鳥羽上皇1107~1123)은 손수 도검을 단련(鍛鍊)하였으며 전국의 우수한 도공(刀工)을 불러서 칼을 만들도록 했다. 이것을 어번단야(御番鍛冶)라고 부르는 것이다.
도(刀)의 길이는 오랜 옛날은 2,3척 정도인 것이 많았으나 가마쿠라(鎌倉時代)시애에 와서 대태도(大太刀)도 쓰였으며 시마야마 시게타다(島山重忠)이 쓴 칼은 3척 9촌 이었다고 한다.
이어 무용을 뽐내는 풍조는 5척 6촌 심지어 7척 3촌가지의 긴 칼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 3척 5촌길이 칼을 사용했다. 이럴 때 칼을 찰 수 있는 길이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때 까지 칼을 차지 않고 다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시카가(足利1338~1573)시대오안(應安1368-1375)에이와(永和1375~1379)를 전 후 해서 무사도 긴 칼(長刀)의 필요를 인정하지 않기로 했고 이 때 부터 패도(佩刀)의 풍습이 변화를 가져왔다. 종래의 패도(佩刀)는 칼날이 아래로 보게 허리에 매달았으나 칼날이 위로 보이게 하여 허리에 꽂는 것이 많아졌다.
이런 변화와 함께 대체로 칼은 2척 4~5촌 정도로 되었다고 한다. 칼의 길이가 짧아진 이유 중의 하나는 칼이 길면 칼집이 땅에 질질 끌리게 되는 것이 큰 이유였다. 점점 전쟁이 더 잦아지고 전쟁도 마상전(馬上戰)에서 도보전(徒步戰)이 많아졌으며 개인적인 싸움에서 집단적 싸움이 되고 창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여기서 패도(佩刀)문화의 변화에 주목하고 상식선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이런 패도 문화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칼날이 아래로 향하게 차는 경우는 별도로 칼집 채로 허리에 차는 경우이기 때문에 칼을 뽑을 때는 자신의 편리에 따른 발도(拔刀)를 하게 된다. 칼을 허리 꽂을 경우는 달랑달랑 칼집 채로 달고 다니는 경우와 허리에 꽂아서 칼 자체가 자신의 몸에 밀착된 채로 고정되어 있을 때는 칼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형식의 뽑아 칼이 편리한 것이다. 여기서 달고 다니는 칼과 꽂고 다니는 칼의 경우가 달라진 것이다. 더욱이 꽂을 경우는 발도(拔刀)자체가 하나의 기술로 승화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거합도(居合도)의 발생 배경이 될 만하다. 그러함에도 우리의 패도(佩刀)법은 칼날이 아래로 가게 차고 일본은 칼날이 위로 가게 찬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일본의 도검 발달이 그네들의 자랑이라면 그에 못지않은 발달이 바로 패도문화이다. 이것이 단병접전 때 상대 보다 칼을 먼저 뺄 수 있는 엄청난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있다. 최근 조선세법이나 본국검도 원래 우리나라에 꽂는 패검 문화가 없었다고 생각 되면 그럴 때 칼날을 아래로 가게 꽂는 것은 잘못이다. 다만 조선세법과 본국검을 검이 아닌 도(刀)로써 사용하고 일본식 검술로 변화시킨 무예 도보통지의 예도나 본국검은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로마찌시대 잦은 전란으로 도검의 수요가 현저하게 늘어나고 명도(名刀)와 잡도(雜刀)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실전에 적합한 것이 많이 나왔다. 도꾸가와 (德川)시대 즉 신도기(新刀期;게이쵸(慶長) 1596~1615 이 후의 만도칼)에 들어서면서 점차 칼의 장식이 꽤 사치해 갔다. 칼집에 도색을 한다든지 코등이 손잡이 끝 등에 아름다운 글을 새긴다든지 했다. 그러나 도꾸와이 전까지의 검도를 보자. 그 많은 전투 중에 절박하게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 오직 죽이는 기술만 이 지상과제였다. 그 과정에서의 인간성은 한없이 잔인해져 갔을 것이다. 싸움에는 이기기 위한 싸움꾼과 지지 않겠다는 싸움이 있다. 이기기 위한 싸움은 인간성이고 뭐고 오직 잔인할 뿐이다. 지지 않겠다는 싸움은 비겨도 좋다는 의지도 있다. 전자가 일본 검도의 원래 모습이요 후자의 모습이 조선 세법의 모습이다.
공자와 시성 이백의 검도 후자의 모습이다. 이럴 때 발달 되는 것은 무한한 살인 기술이다. 이 때 죽음에 대한 생각도 달 라 지게 될 것이다. 사람 목숨이 이기기 위한 기술 전개 과정에서는 그렇게 존중될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이 때 형성된 것이 일본 무사의 정신세계의 기조가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야가(沙也可)-임진왜란 발발(勃發)시 왜장 가토오 기요마사의 좌장군으로 자원하여 부산 도착 하자말자 박진장군에게 항복하여 왜군과 여진족 등 전투에 혁혁한 공을 세움. 김충선이란 이름을 선조에게서 성과 이름을 하사받다.
※물타(物打)- 우리 쌍수 검술 조선세법과 대비 되는 유일하고도 막강한 위력을 갖는 일본 쌍수도의 목표물을 자를 때 그 목표물을 통과 하는 칼날 부분을 말한다.